고등학교 2학년 때의 국어 생활 시간이었다. 국어 생활을 가르치시는 선생님께서 나를 무척이나 이뻐하셨다. 각 반마다 '이쁜이'를 정해놓고 이쁜이에게 온갖 관심과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던(?) 분이셨는데, 내가 우리 반의 '이쁜이'였다. 수업 시간, 교과서에 '무엇 무엇을 해봅시다'하는 것들은 모조리 나의 차지였고 무언가를 읽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또 나를 시키셨다. (이것에 대해서 다른 애들이 질투 따위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반 아이들이 그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있던 날에도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국어 생활 시간에 선생님의 부름에 응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진도를 나가는 와중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발췌한 것이 나와 선생님께서는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게 나를 시키셨고 나도 좀 귀찮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 발췌문을 읽어내려갔다. 그 부분은 《메밀꽃 필 무렵》의 백미이자 이효석 문학의 중심이고 대표적인 문구로서 메밀꽃이 핀 장면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를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서 내가 감정을 잡고 읽고 있었는데, 두번째 문장을 읽자마자 애들이 막 웃는 것이 아닌가. 완전 개폭소였다. 나는 왜 그러는지 몰라서 선생님 얼굴을 쳐다봤는데 선생님도 그냥 저냥 심드렁한 얼굴이셔서 나는 나머지 부분을 쫙 읽고 내려갔다. 읽고나서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내 짝 曰 "야, 너 요즘 야설 너무 많이 읽는 거 아니냐?"
허허, 무슨 소리. 그 당시 나는 '19금 이야기를 잘 하고 무척이나 그 방면의 이론에 뛰어난 아이'로 온 학교에 명성이 자자했지만서도 일부러 찾아 읽지는 않았다. 중학교 시절에 열심히 온갖 것을 섭렵하면서 다 뗐던 걸 (*-_-* 무엇을?) 뭣하러 다시 보겠나. 나는 내 친구의 말을 상큼하게 씹어주곤 다시 수업에 집중을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내 자리로 몰려온 친구들.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데 나 완전히 뒤로 넘어갈 뻔 했었던거 아닌가. 그 발췌문의 전문은 이렇게 되어있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그런데 내가 이걸 이렇게 읽었던거 아닌가.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신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오 마이 갓!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를 '짐승 같은 달의 신음소리'로 바꿔읽다니, 이런 개뼈따구 같은 일이 있나. 나는 이것도 모르고 멀뚱히 쳐다보다가 무심하고 쉬크하게 나머지 문장을 읽어내려 갔었던 거 아닌가. 이런 쒯!
나, 그 뒤로 《메밀꽃 필 무렵》은 절대 안 읽는다. 덧붙여서 저 문장 절대로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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